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싶다. 뭘 어쩌자는건지. 심리상담 중에 내가 지금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이 흐릿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는? 아마도, 원하는 게 확실했던 것 같다. 내 에니어그램 유형인 7w8에 대한 설명 중에도 확실한 상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명확한 것. 뚜렷한 것. 세상은 흑백이 아닌 회색들로 이루어져있다지만, 적어도 나 자신과 내가 보는 것들은 흑백으로 분리해야 안정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나 자신과 내가 보는 것들은 곧 내가 사는 세상의 전부인 걸 안다. 아무튼 그랬던 것 같다. "같다."라는 표현을 자꾸만 쓰는 것도 기분이 안 좋다. 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원래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요즈음의 나는, 관계를 끊는 게 맞다고 판단되는 사..
세상이 나를 빼놓고도 잘 돌아간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누군가는 가고, 내가 포기한 일을 누군가는 해내고있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군가는 갖고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고있는데, 나는 여기에 멈춰서 누가 근황을 물을 때마다 "팽팽 놀아요."라고 대답한다. 일요일마다 커피를 두 잔 넘게 마시고 밤을 새 몽롱한 월요일을 맞이하는 것이 이제는 루틴이 됐다. 밤을 새는 것은 우울감을 반짝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봤던 것 같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밤산책도 다녀왔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주민센터 무인기기에 가서 검정고시 성적 증명서를 출력해 방통대 성남지점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LH 재계약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
얼마 전 나 혼자 신나서 떠들었던 순간들을 부끄러이 떠올려본다. 그 날 나는 외로웠고,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내가 요즈음 어떻게 사는지, 왜 그렇게 사는지 궁금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침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이야기를 잘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음에도,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네요라는 말이 얼마쯤 뻔하고 또 부끄럽게 느껴져 말았다. 겉치레 인사도 없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은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그 순간을 희생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몇 번의 리액션과 질문에 계속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를 그냥 그런 사람, 할 말이 많은 사람, 자기 이야기가 많은 사람 정도로 생각하며 그 순간을 지났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아무 데나 고개를 파묻고 울어버리고 싶다. 밝은 모습이건, 확신에 차 있던 모습이건 껍데기일 뿐인데 그 껍데기마저 관리가 안되고 있다. 우울할 때 글이 잘 써진다고 누가 그랬지, 은유 작가님은 쓰는 고통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강할 때만이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안 쓰는 고통 따위 모르는 사람이면서도, 어쩌면 안 쓰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지금 블로그에라도 끄적이고 있나. 무언가 내 안에서 끄집어내고 싶다. 거대한 우울을, 거대한 분노를, 억울함을. 더럽고 추악한 뭔가를 꺼내는, 피지를 짜내는 듯 더러우면서도 짜릿한 경험 한 번 이면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다. 모든 문제가 그렇게 한 방으로 해결되길 기대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삶은 한 방과 다른 한 방 사이의 무엇이 아니라 하루하루 쌓이..
말귀를 못알아들음에 대한 내 분노는 내 주양육자였던 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 어느날 몸살을 앓던 나는, 몸살이 빨리 낫도록 찜질방에 다녀오고싶었다. 찜질방 다녀오게 용돈 좀 달라는 내게 할머니는 말했다. "찜질방 간다고 몸살이 낫지는 않는데, 다녀오고싶으면 다녀와." 이미 말귀를 못알아들음에 대한 분노가 누적되어있던 나는, 머릿속 인내의 끈이 곧바로 끊겨 화를 냈다. 찜질방에 간다고 몸살이 낫는게 아니라면 내가 대체 왜 찜질방에 가냐고. 애초에 뚜렷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에 소용이 없다면 내가 대체 왜 그걸 실행에 옮기냐고. 할머니는 똑같은 말만 조금 다른 말투로 반복할 뿐이었다. "거기 간다고 몸살이 낫는 거는 아니야, 그래도 가고싶으면 가라고." 내 분노는 벽을 향하는 것과 같았다. 할머니는 한결같..
아무래도 조증인 것 같아, 어떤 이유들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신과 주치의에게 말했다. 그날로 약이 모두 바뀌었다. 정신이 너무 들뜬 탓에 무엇에도 집중은 못하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뿐이었는데 약을 바꾼 후로는 그나마 생산적인 일들이 가능해졌다. 저녁 약을 먹고 조금 어질 한 기분으로 집 청소를 그리 열심히 했다. 한 주 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조증 상태가 조금 가라앉아 일상이 풍부해졌다며 기뻐했다. 의사는 다행이라며 약을 2주 치 처방해줬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 번 방문할 때마다 한 주 치의 약을 처방받는다. 처음으로 꽤나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지난달에도 딱 한 번 열흘 치의 약을 처방받았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과 주치의의 일정이나 내 주머니 사정 등 예외의 경우에만 2주 치를 처방받는다. 아무튼 ..
진로 적성을 찾고 취업까지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센터의 시작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프로그램 참여 청년으로서 잠시 마이크를 잡았다. 너무 잘 말해주었다는 인사들을 몇 번 들은 그 말의 내용을 블로그에도 올려본다. "어른들 앞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는 참 드물고 소중하기때문에 하고싶은 말 꼭 다 하려고, 또 스마트폰 중독 세대로서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오늘의 할 말을 적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카페 노동자, 정신 질환자, 글쓰는 사람) 이아진입니다. 한국 사회는 참 정겹고 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불평등에 대해 말하자면, 계급이 아주 세세히 나뉘어있어 사람이 참 궁상맞고 이상해집니다. 저는 가끔 저항합니다. 그리고 자주 타협합니다. 더 자주는 도망칩니다. 내 능력과 ..
불안은 막막하다는 느낌에서 시작된다. 뭘 해먹고 살 것이며 내 인생은 어떻게 될 것이고 집은 언제 다 치울 것이며 이 집 다음에는 어디에 살 것인가. 너는 네 인생에 진정 만족하는가, 이게 최선인가. 대체로 정답도 없거니와 답이 떠오르더라도 당장 뭔가 실행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최선을 다해 무시하고 나는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다. 초콜릿을 먹고, 라면을 먹는다. 다리를 꼬았다가 푼다. 의자 위로 가부좌를 틀었다가 풀고 신발을 신는다. 한 쪽 다리를 떤다.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며 다리를 꼬았다가 또 다시 푼다. 심장이 너무 뛰는 것 같아 물을 마신다. 집에 가면 무엇을 할지 생각한다. 내일은 무엇을 할지 생각한다. 계획대로는 안하겠지만 당장 그 생각을 하면 조금 편해진다. 보통 이쯤에서 아얘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