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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뜨거운 거짓말

떡볶이 할머니

아진_ 2019. 10. 21. 17:17

 순이는 학교가 끝나면 늘 떡볶이를 먹으러 갔다. ‘할머니 떡볶이’에서는 순이가 태어났을 때부터 1인분이 2천원이다. 떡볶이 할머니는 고추장보다 케첩을 많이 넣고 떡볶이를 만들었다. 떡볶이 1인분에 오뎅 두 개가 순이의 저녁식사였다. 순이는 아빠랑 단 둘이서만 살았는데, 순이 아빠는 밖에서 저녁밥에 막걸리까지 잡숫고 집에 오셨다. “이걸로 떡볶이도 사 먹고 오뎅도 사 먹어라.” 그렇게 말하며 순이에게 매일 주어지는 5천원권 한 장은 어린 나이에 큰 돈일 수도 있었지만, 준비물을 사려면 턱없이 모자란 돈이었다. “아빠. 서예 세트를 사야 하는데 만 오천원이래요.” 순이는 술에 취한 아빠의 이상한 표정이 무서워 공손하게 말했다. 순이 아빠는 순이에게 만 오천원의 돈이 아니라 한 시간 반짜리 옛날 얘기를 꺼냈다. “순이야. 아빠는 열 살에 한글을 배웠지만 지금 먹고사는 데에 문제없잖니.” 순이는 서예 세트를 살 수 없었다. 이제 순이는 오뎅 없이 떡볶이만 먹고, 3천원은 꼬깃꼬깃 모았다. 새 학기마다 꼭 사야 하는 공책들과 새로운 준비물들이 있으며 꼭 갖고 싶은 것들도 있었다. 리락쿠마 나노 블록 시리즈를 하나씩 구입해서 조립하고 창가에 진열해두고 싶었다. 순이가 리락쿠마 나노 블록을 두개째 조립한 날, 순이네 동네의 리락쿠마 시리즈는 모두 팔려버렸다. 순이는 꿈꾸던 창가의 모습을 가슴에 묻었다.

 울퉁불퉁 토마토는 주스가 될지 춤을 출지 고민하다가 케첩이되었다. 케첩은 계란 후라이의 양념이 되거나 핫도그의 양념이 될 것을 기대했지만 떡볶이의 재료가 됐다. 매콤한 고추장과 만나 인사를 했다. 달콤한 설탕도 만나 인사를 했다. 무엇도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토마토는 이제 외롭지 않았다.

 매콤 달콤 새콤한 떡볶이 냄새를 맡으면 순이는 입에 침이 고였다. 떡볶이 양념을 입술에도 묻히고, 옷에도 몇 방울 묻히고 한그릇을 다 먹으면 떡볶이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순이는 매일같이 떡볶이를 먹으며 훌쩍 커버렸다. 이젠 입가에 양념을 묻히지 않는다. 옷에는 여전히 몇 방울 튈 때가 있다. 

 “순이야. 떡볶이만 먹으면 키가 안큰다.”

 떡볶이 할머니의 말에 애정이 섞인 것을 알고 빙긋 웃는 순이는 지금 열다섯 살이다. 이제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맛있게 마실 줄 아는 순이는 할머니의 떡볶이가 자꾸만 달아지는 것 같다. 

 “할머니, 떡볶이가 너무 달아요.”

 “순이 키 크지 말고 계속 떡볶이만 먹으라고 설탕을 많이 넣었지.”

 “그게 뭐에요.”

 순이는 퉁명스레 대꾸했다. 처음부터 할머니였던 떡볶이 할머니가, 점점 더 할머니가 되는 게 속상했다. 좋아하는 나노 블록을 조립해서 창가에 진열하는 일, 떡볶이 할머니의 떡볶이를 계속 먹는 일. 일상의 사소한 행복이라고 부를 이것들이 순이에게는 큰 의미였다. 동네의 문구점에서는 더 이상 나노 블록이 입고되지 않는다고 한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아주 많은 종류의 제품들이 있었다. 이미 잔뜩 구입하고 컬렉션을 완성한 사람들이 올린 사진들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창가나 책장이 아닌 유리장에 나노 블록을 진열해놨었다. 순이는 그냥 떡볶이 할머니를 기억하기로 했다. 어려운 것들이 쉬워질 때까지, 지금 쉬운 일들에 감사하기로 했다. 순이는 앞으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 오뎅만 먹으러 이곳에 오면 어떨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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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21일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던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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