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따듯한 소바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당신이 내 안에 번져나가는 듯한 따스함을 느낀다. 따듯하다, 라는 단어를 되뇌이며 눈을 감았다. 소바차를 뜨거운물로 우려낸 것을 담은 이 컵과 당신이 따듯하다. 당신이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러준 그 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며 사랑에 빠졌다. 내 이름을 부르던 당신의 목소리를 몇 번씩 되뇌이며 미소지었다. 미소라기엔 참 큰 웃음이었다. 당신은 나를 웃게한다. 이제는 당신의 목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난다. 나는 그냥 당신의 말을 듣고 웃기만 했다. 당신은 나를 재미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겠지. 사실 당신은 나에 대해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생각 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영영 날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에 잘 빠진다 뿐 사랑을 하는 것과 쟁취하는 것에는 서툴다. 웃을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영원히 그러기로 했다.
나는 삶에도 서툴었다. 주인공이 욕조에 물을 가득 받고 그 안에 들어가 손목을 긋고 자살하는 장면을 봤다.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주인공이 아름다워보였다. 우리집에는 욕조가 없다. 민트색 대야에 뜨순 물을 받았다. 손목을 긋고 담구니 피가 일렁일렁 퍼졌다. 그것은 아주 잠깐 빨강이었다가, 분홍이었다가, 주황이었다가, 이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건으로 손목을 닦으니 피가 묻어나왔다. 죽을만큼은 아니었지만 바로 괜찮을 만큼도 아니었다. 손목의 물기만 다 닦고서 방으로 돌아왔다. 이불을 덮고, 아직도 피가 조금씩 맺히는 손목을 이불 밖으로 빼고 쳐다봤다. 아프다. 당장 피가 맺히는 손목보다 살아있는 오늘이 아프다.
다음 주말에 당신을 만난다. 그럼 그 때 까지는 살아있을 이유가 있다. 오늘 손목을 그은 것은 그 날 이후의 죽음을 위한 연습같은 것으로 친다.
벌써 4월인데 바람이 참 매섭게도 분다. 실내에 들어가면 또 금방 후덥지근하다. 내 얼굴의 볼부터 귀까지 벌개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도 아직 몸은 춥다. 나는 이 애매함이 싫어서 추운 곳으로 가기로 했다. 따듯한 소바차 한 잔을 사서 공원으로 가 벤치에 앉았다. 몸을 뎁힐 때는 속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볼과 귀가 벌개지지 않는다. 매섭던 바람도 선선한 정도로만 불고있다. 실내에서 벌개진 볼과 귀가 가라앉는 것이 느껴진다. 뜨거운 모든 것들이 식어간다. 당신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분홍색 마음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어제 물 받은 대야에서 보았던 분홍색 생각이 나서 소매를 걷어 손목을 봤다. 아프다.
아니다. 사실은 아프지 않다. 아직 딱쟁이도 지지 않은 상처를 봤다. 피딱지를 뜯으니 다시 피가 조금씩 맺힌다. 사실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그래도 더는 붉어지고싶지 않다. 기꺼이 슬픔에 나를 내어주고,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