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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꽃 길

아진_ 2019. 10. 21. 18:11

진로 적성을 찾고 취업까지 함께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센터의 시작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프로그램 참여 청년으로서 잠시 마이크를 잡았다. 너무 잘 말해주었다는 인사들을 몇 번 들은 그 말의 내용을 블로그에도 올려본다.

"어른들 앞에서,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언할 수 있는 기회는 참 드물고 소중하기때문에 하고싶은 말 꼭 다 하려고, 또 스마트폰 중독 세대로서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오늘의 할 말을 적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카페 노동자, 정신 질환자, 글쓰는 사람) 이아진입니다. 한국 사회는 참 정겹고 또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불평등에 대해 말하자면, 계급이 아주 세세히 나뉘어있어 사람이 참 궁상맞고 이상해집니다. 저는 가끔 저항합니다. 그리고 자주 타협합니다. 더 자주는 도망칩니다.
내 능력과 주제를 파악하며 더듬더듬 갈 수 있는 길을 찾다 여기까지 왔네요. 부끄럽지만 버텨내지 못할 때가 아주 많았습니다. 뒷걸음질 치다보니 보이는 게 절벽 뿐이거나, 실제로 절벽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민센터로 향해 가봐라 응원해준 사람이 있어 용기를 냈습니다. 복지 서비스를 찾고 생계비를 조금 지원받아 제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저학력자 저소득자입니다. 그리고 비장애인 청년입니다. 이런 저에게 주어진 기회는 참 많습니다. 그리고 아주 작습니다. 이걸 모래알에 비유해보겠습니다. 눈 감았다 뜨면 지나가있을 젊은 시기에 '이 기회를 잘 활용해보자'하고 움켜쥐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바람이 불어 사라집니다. 어느새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사는게 참 좋고 즐거워요. 무섭고 억울할 때도 많습니다.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 사는 동네, 주 양육자의 지적 수준, 내 학력) 제 계급을 이루는 요소들을 헤아려보면 제가 한 번 쯤 길을 잃고 다시 돌아가지 못함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저 주어진대로 받아들이고 살아지는대로 살아보자는 다짐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재미도 없고 멋도 없지만 그게 정답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앞으로의 길을 함께 고민할 내 편들과 공간을 만나 기쁩니다. 저는 제가 정말로 좋아요. 아주 멋진 사람입니다. 앞으로 또 얼마든지 대단해질 수 있을지 기대도 됩니다. 그렇게 믿고있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나는 지쳤으니 아무 저항도 도전도 하지 않겠다'한다면 이 세상은 대단한 사람의 등장을 잃고, 잃은 줄도 몰라 아쉬워 할 수도 없을겁니다. 아무튼 제 앞으로는 그렇지 않게 됐습니다. 저를 잃지 않으셔도 됨을 여기 계신 모든 분들에게 축하드립니다. 또 감사드립니다. 저 역시 세상을 향한 사랑을 잃고싶지 않습니다. 꼭 저 뿐만 아니라 피어나길 포기했거나 혹은 피어날 생각도 못했을, 사실은 누구보다 활짝 피울 그런 인재들과 앞으로 만나게 될 것이 기대됩니다. 교육과 정보, 기회의 양분을 만나 앞으로의 1년을 활짝 피워낼 청년들에게 진심으로 기대하고 또 축하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꽃길'이다. 유행하는 단어인 그 말이 영 어색하게 느껴져 매번 '진로적성과 취업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라고 길게 말했다. 조금 아까 자살예방센터의 담당 상담사에게 전화가 왔다. 상담 일정을 조정하기 위함이었다. 내 일정 확인차 '꽃길' 프로그램 계속 참여중이냐고 상담사가 물었다. 잠시 어색한 기분, 그게 뭐였더라 하고 아주 아주 짧은 순간 생각했다. 꼭 유행하는 단어라서 뿐만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닥치는대로 살아지던 흐름, 아주 조금의 선택지 뿐이던 것을 떠올려보면 진로적성 관련 담당 선생님을 만난 것은 꽃길이라고 조금 과장해서 예쁘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그런걸 아니꼽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애초에 저런 내용의 말을 저 자리에서 할 수도 없었을거다.
대단한 포부같은 것은 없이 그저 나에 대한 말이었다. 진로적성 프로그램이 왜 필요했었는지, 무엇이 기대되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적어 읽은 것이었다. 아주 잘 들었다거나 누구는 울었다는 말은 조금도 생각지 못한 반응이었다. 대체 어느 부분에 눈물이 나셨냐 물어보니 '계급'에 대한 언급 때문이라고 했다. 너무 확실히 존재하는 그것에 대해 아무도 소리내어 발음하진 않지만 모두가 알고있는 것. 어떤 사람들은 그 일부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피해의식과 피해망상, 콤플렉스라는 단어 등을 사용하여 그 존재를 부정하는 것.
계급의 존재가 내게 절절히 와닿기 전까지 내가 내 삶에 어떤 종류의 것들을 기대했었는가 떠올려보면 눈물이 난다. 나는 공부가 하고싶었다. 아주 많은 공부가 하고싶었다. 역사나 문학, 인테리어 디자인 등 내가 흥미와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는 분야의 대단한 전문가가 되고싶었다. 아르바이트로서나 정규직 직원으로서 몇 년간 해온 서비스직의 경우, 자기 분야에서 그보다 덜한 전문가밖에 못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그 안에서 이 사람들이 어떤 전문성을 갖고 얼마나 능숙하게 자기 개성을 살려 일하는지 봤다. 그 일은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듯 하지만 누구나 버티고 해낼 수 있지는 않다. 나는 해내는 듯은 했어도 버텨내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 주저앉았고, 더듬더듬 뭔가를 찾아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어 진로적성을 찾으려는 게 당연히 아니다. 넘어진 김에 길 좀 둘러보겠다는 거다. 곧 가게 될 길이 정말 꽃길일 수도 있겠다. 아직 센터의 시작을 축하했다 뿐 꽃길 프로그램은 OT 조차 하지 않았다마는 그래도 그게, 정말 꽃길 씩이나 될 수 있을까? 그저 유행하던 단어에 지나지 않고 그만큼 객관적 정의는 없으니 한 번 끼워맞춰보련다. 꽃이 걷는 길이라서 꽃길이 될 수는 있겠다.(어떻게 사람이 꽃이 될 수 있는지는 다음에 생각해보기로 한다.) 여럿이 같이 걷는 모양이 꼭 활짝 피어난 것 같아서 꽃길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저 부잣집 담벼락을 높이 빼곡하게 타고 오른 나팔꽃보다 활짝 피우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들에서 피든 늪에서 피든 아무튼 꽃을 피울 수 있겠다. 이 쪽 저 쪽에 비교한다면야 슬프고 서러운 날 뿐이다. 굳이 비교를 하지 않더래도 슬프고 서러운 날은 있을 거라서 작정하고 비교를 하는게 이로운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부정하지 않으련다. 어디에 피어있든 꽃은 꽃이고, 저마다 향기를 머금었고, 예쁘다. 지금 사는 꼬락서니가 시궁창처럼 느껴진다고 그것마저 부정하지는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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