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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조증인 것 같아, 어떤 이유들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신과 주치의에게 말했다. 그날로 약이 모두 바뀌었다. 정신이 너무 들뜬 탓에 무엇에도 집중은 못하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뿐이었는데 약을 바꾼 후로는 그나마 생산적인 일들이 가능해졌다. 저녁 약을 먹고 조금 어질 한 기분으로 집 청소를 그리 열심히 했다. 한 주 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조증 상태가 조금 가라앉아 일상이 풍부해졌다며 기뻐했다. 의사는 다행이라며 약을 2주 치 처방해줬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 번 방문할 때마다 한 주 치의 약을 처방받는다. 처음으로 꽤나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지난달에도 딱 한 번 열흘 치의 약을 처방받았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과 주치의의 일정이나 내 주머니 사정 등 예외의 경우에만 2주 치를 처방받는다. 아무튼 약을 바꾼 직후 일주일, 그리고 의사의 사정에 의했던 이주일 동안 조증 상태를 꽤나 즐겼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까르르 웃고 수다를 떨었다. 방을 곧잘 치웠다. 작년 겨울 사놓고 이번 겨울까지 방치했던 뽁뽁이를 집 안의 온갖 창문에 붙였다. 와중에 손님을 맞이하게 됐는데, 한참을 방치해두기만 했던 작은방도 꽤나 정리했다. 자기 탐색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던 시간에는 너무 몰입한 나머지 책상을 쾅 치고 잠시 몸을 일으켰다 민망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조금 별개의 이야기, 여성병원에서 처방약 안내를 들으며 "이 약 먹을 때는 술 드시면 안 돼요."라는 말에 그럼 맥주나 이슬 톡톡도 안될는지 고민하는 스스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중독관리센터에 전화해 상담을 예약했다. 상담 후 술과 담배를 자제하는 데에 성공하는 듯 했지만, 몇 차례 폭식을 했다. '이럴 거면 담배를 피울걸'싶었다. 모든 중독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고 한다. 요즈음 트위터의 그 밈처럼 말이다. "난 평생 자극을 좇았던 것 같아. 술, 담배, 그리고 ..."

 우리 집 작은방에서 지내게 된 손님은 나와 비슷한 부분들이 참 많았다. 그게 조금도 이상하거나 싫지 않았다. 너무 즐거웠다. 우리는 매일 네 시간가량 수다를 떨었다.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긴 수다 끝에 나는 샤워를 하고 조금 자고 일어나 하루의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 8시 즈음 침대에 누웠다가 12시쯤이면 다시 일어났다.

 이 즐거운 시간들 속에 내가 안 하던 것, 못하던 것은 책을 읽는 것과 스트레칭이다. 책이 나에게 어떤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가, 나도 몰랐던 내 마음의 한 부분을 남의 글로 읽는 것 같아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나를 모르는 누군가 내 마음을 이렇게 읽어줄 수 있다면,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와 닿는 문장 혹은 내용들에 눈물을 흘릴 때도 많다. 그리고 스트레칭, 나는 스트레칭 강사 강하나 선생님의 유투브 채널 '강하나 스트레칭'을 정말 좋아한다. 가장 자주 하는 것은 강하나 하체 스트레칭과 자기 전 스트레칭인데, 하루 종일 앉아있는 사람도 서있는 사람도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앉아있다가 서있기를 반복하는 사람도 하체 스트레칭을 하면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전 스트레칭은 이름 그대로 자기 전에 하면 그리 좋다. 분명 잠이 안 와서 '스트레칭만 하고 누워서 책을 읽거나 트위터 하다가 자야지'라고 생각하며 스트레칭을 시작하면, 15분가량의 스트레칭 중 앞의 4분 정도만으로 잠이 쏟아지고 온 몸이 풀어져 기분도 좋다.

 그런데 이 두 개를 못했다. 왜? 나는 다른 조울증 환자들의 사례도 잘 모르고 조증에 대해서도 정확히 아는 게 거의 없지만, 내가 겪는 조증은 '정신산만함'이다. 스트레칭이나 책 읽기를 시작하려 함과 동시에 무엇을 당장 메모하거나 검색해야 한다는 등의 아이디어가 번뜩이고 떠오른다. 이 사람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약속을 해야지! 시간이 이 날과 이 날 비니까 단기 알바를 찾아서 지원해야지!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 혹은 덧글이 늘었는지, 트위터에 알림이 떴는데 내가 확인하지 못한 것이 있는지 등 생각하고 살피다 보면 책 읽기나 스트레칭은 시도도 못 할 만큼 피곤한 상태가 된다.

 가뜩이나 지금의 나는 간 수치가 상당해서 하루에 세 번 간장약을 먹으면서도 아침에 눈을 뜨면 온 얼굴이 어떻게든 띵띵 붓고 눈이 떼꼰해서 왜 그리 피곤해 보이냐던가, 그 몸 상태로 그 일정이면 쓰러지는 거 아니냐는 말들을 듣고있다. 이것은 단순히 들뜬 것이 아니고 조증의 그것이다라고 인지하게 된 이유도 그렇다. 나는 분명 간 상태가 후져서 남들보다 더 쉬고 더 잘 먹어야 할 터인데, 밥은 밥대로 안먹고싶고 안먹는데 하루 종일 그냥 빨빨거리고 돌아다닌다. 머릿속도 정신 사나우니까 어느 한 자리에 앉으면 그 정신 사나운 머릿속을 다 쏟아내느라고 그 한자리에 붙어있기도 한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정신과에 가서 요즈음의 상태를 말했다. 워낙에 말을 장황하게, 그 어떤 가벼운 소식도 기승전결을 반드시 말하고싶어하는, 요즈음 말로 TMI인간. 나.

정신과에서만큼은 최대한 간결하게 요점을, 그것도 정신과 의사가 조언해줄 수 있을법한 성질의 내용만을 전달했었다. 주치의는 내게 실질적인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전문가이다. 정신과 의사라고해서 모든 환자의 모든 말을 다 들어줘야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나는 주치의의 의견이나 조언의 말도 기대하기 때문에 내 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하고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얼마나 조증 상태가 심각해졌는지 설명하며 "책이 너무 읽고싶거든요", "책이 안 읽혀서 너무 힘들어요"라는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만 세 번쯤 했었다. 주치의는 언뜻 당황스러운 표정도 지었으며 약을 조정하며 "좀 쳐질 거예요."라고 말했었다. 그날 나는 아직 아침 약을 안먹었었고, '그럼 오늘 아침 약은 오늘 처방받은 약으로 먹는 게 좋으냐'고 물었었다. 병원을 나와 다음 일정 공간에 도착해서 바로 약을 먹었다.

 아주아주 조금 차분해지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떠들 것 다 떠들며 장난도 치다가 저녁 알바에 다녀왔다. 귀가 후에는 일단 가방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어 던지고 방바닥에 누워 스트레칭을 했다. 이건 내가 조금이라도 차분해졌다는 증거다. 그리고 엄청난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저녁 약을 먹었다. 사랑하는 인디음악 라디오 애플리케이션, '랏도의 밴드뮤직'의 슬릭님 방송은 열한 시였고 이미 알림이 뜬 걸 확인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듣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당장 들을 수 있으면서도 너무, 너무 피곤한 나머지 들을 수 없음이 속상했다. 그리고 열두 시쯤 잠시 깨어 카톡을 확인했는데, 이러저러한 말을 답장으로 보내려고 생각만 들뿐 그걸 실행에 옮기는 것이 어렵게 느껴져 참 곤란하고 미안했다.

 

 그리고 오늘이다. 오후 세시가 넘어 일어났다. 중간에 한 번을 안 깼는데, 그건 내게 당연한 일이지만 열다섯시간을 내리 잤다는 것과 어질 한 상태로 눈을 뜬 것은 두려운 일이다. 고등학교를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처음 빵 터졌던 우울증 증상이 바로 그놈의 잠이었다. 잠이 도통 제어가 안되어 학교를 자퇴할 수밖에 없었던 기억과 자느라 지각했던 몇 직장에서의 날들 역시 여전히 공포다. 나는 그거 때문에 아직도 죽고싶을 때가 있다. 세상에 어른이, 스스로를 돌보고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한 사람의 인간이 자기가 잠자는 것을 어찌하지 못한다면 죽는 것 말고 무슨 답이 있겠냐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그래도 요즈음 좋은 생각들도 많이 했으며 좋은 책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자연스레 좋은 경험도 많이 했으므로 그 두려움의 구덩이로 들어가지는 않을 수 있었다. 

 

 배달음식 주문해먹고 남았던 것과 집에서 해먹고 아주 조금 남았던 것이 냉동실에 있었다. 한 이십 분쯤 해동 모드로 전자레인지에 덥혔다. 그동안도 어질 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서 답장할 기운을 억지로 짜내어 카톡 몇 개에 답장을 간결히 보냈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며 설거지를 하지는 못하고 설거지 바구니 안에 있던 것들을 널브러져 있지 않게 정리만 했다. 다 해동된 음식을 먹고, 화장실에 갔다가 담배를 한 대 피우니 어질 하던 것이 조금 덜해졌다. 원래는 어제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일어난 시간이 애매해서 못 갔던 여성병원, 아까는 너무 어질 하고 속상한 상태였으니 하루만 더 미루자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옷을 대충 주워 입고 나왔다. 현관문을 열고 한 발짝 나오자마자 바람이 찼다. 목도리를 찾아 두르고 다시 나왔다. 우편함에는 내게 도착한 우편물이 있길래 뜯어보니 청년 배당을 수령하라는 우편이었고, 나갔다 돌아오는 김에 와이파이가 되는 카페에 앉아 오늘 신청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시 또 집 안으로 들어가 가방에 노트북을 챙겼다. 책도 몇 권 챙겼다. 카페에 주야장천 앉아있을 생각이었다.

 

 거의 나았을 것을 예상하고 마지막으로 상태만 확인할 겸 한 번 더 오라고 말했던 여성병원에서는, 생각보다 회복이 더디다며 약을 다시 처방해줬다. 식후 즉시 먹으라던 독한 약들이었다. 아무래도 간수치가 높은 탓에 간장약도 먹는 상태에서 독한 약을 먹어 간이 천천히 낫고있듯이 간이 제 기능을 못하는 상태에서 먹은 독한 약들도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병원에서 준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들러 약을 받고서 바로 카페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몸이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 진짜 피곤하다고. 그래서 '그래, 그냥 쉬자.' 휴대전화의 핫스팟을 켜면 집에서도 노트북으로 온라인 접속 가능하니까. 그런데 집으로 올라오는 언덕길에 카페가 있어서 들렀다. 거기서 지금 이 일기를 한 시간 가량 쓰고 있다.

 

 눈을 뜬 후 어질 한 상태로는, 잠을 그렇게 한참 자고 일어난 어질한 상태의 내가 너무 싫었다. 이렇게 살 거면 그냥 죽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조증이 심해지던 지난주에는 '백자 하루'라는 아주 짧은 일기도 쓸 수 없었던 것을 떠올려본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한 번에 팡팡 떠올라서 좀처럼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었으며, 아침에 눈을 뜨면 바로 활발해진 정신에 의해 배도 잘 안 고팠으니 저녁이나 밤중에 폭식을 하기도 했다. 오늘은 한참 자고 일어난 후에 바로 허기를 인지하고 뭔가를 먹지 않았는가. 노트북을 펼치고 한 자리에 앉아 일기도 쓰고 있지 않은가. 어젯밤에는 스트레칭도 하지 않았는가. 약은 일단 오늘 저녁이랑 내일 아침 것을 먹고 병원에 또 한 번 전화해보려고 한다.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병원에 전화해서 저녁 약 몇 개 빼고 먹고 싶다고 어떤 걸 빼도 좋을지 물었는데, 직장도 안 다니고 하니 좀 쉬라고 일부러 세게 쓴 거라고 원래 쳐질 수 있는 거라는 대답을 들었었다. 나는 직장을 안 다닐 뿐 일정이 없는 건 아니라고 말했다. 주치의는 그럼, 앞으로 이삼일만 더 먹어보고 다시 약을 조정하든지 하자고 일단은 좀 더 먹어보자고, 그래서 나도 알았다 하고 끊었었다. 

 지난 며칠뿐 아니라 조증 기간의 나를 떠올려본다. 간 상태가 아주 후져서 하루에 열 시간쯤 자는 게 바람직했을 거다. 그리고 깨어있는 동안은 스트레칭을 하고, 가까운 슈퍼에서 이따금씩 장을 보고, 집에서 끼니를 챙겨 먹는 정도의 노동만이 바람직했을 거다. 그러나 나는 그럴 생각도 않았다. 하루 일정이 많게는 서너 개, 적게는 한두 개다. 알바도 체력을 꽤나 요구하는 주방 알바를 하면서 운동장에 달리기를 하러 나간 것도 두 번이나 된다. 그러니 조증 상태를 벗어난 몸이 드디어 이 몸을 쉬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지난 피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오늘 열다섯 시간이나 자게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오늘은 책을 읽을 수 있다. 일기를 이만큼이나 썼으니까. 

 

 

덧붙이는 조울증 이야기

 주치의에게 이런걸 물어본 적이 있다. 내가 조증이었던 적이 분명 있는 건지, 그냥 내 성격은 아닌지 헷갈리는데 어떻게 구분하냐고. 주치의는 여러 설명을 해주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사실은 울증과 조증이 그리 다르지 않아요."

 우울증 상태의 공허함, 슬픔은 조증 상태에도 존재한다고 한다. 다만 나타나는 방향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 삼주 가량 하늘까지 닿도록 마음이 방방 뜨던 나는, 점점 심해지던 공허함과 슬픔으로부터 있는 힘껏 도망치는 중이었던 것. 좋아하기 때문에 미워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분노하던 수많은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내 진심은 사실 이랬어, 사실은 서운했고 사랑받고 싶었어. 그걸 나 혼자서라도 인정하면 무너질게 너무 무서워서 미워하고 분노할 뿐이던 나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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