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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에서 회피에 대해 말했다. 내 성격 유형의 특징이 ‘회피’인데 난 회피를 안하니까 이 유형이 아닐 수 있다 생각했으나 매사에 그렇게 살고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요즈음 연애하고싶은 마음이 들어서 이 사람 저 사람 눈여겨 보는데, 여러 사람을 눈여겨 보고 마음에 담는 것이 꼭 내 깊어지는 감정에 대한 회피 같다고 말했다. 연애 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는 한 사람에게 깊이 빠지기를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내가 깊게 빠지면 잘되지 않을거라는 확신같은게 있어요.”
내 말에 주치의가 대답했다.
“확신이 있는게 아니고, 지레 겁먹는거죠.”
그리고 정신과 진료를 꾸준히 받는 것은 회피하는게 아니라고 짚어주기에 내가 말했다.
“그래서 제가 회피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거에요.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고 약을 먹지 않으면 회사에 갈 수 없고, 돈을 못 벌면 살아갈 수 없으니까요. 회피할 수 없는 일들이 제 삶에 많았어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큼은 회피할 수 없기 전에 마주하고싶다. 돌이켜보면 나는 힘든 순간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회피를 반복하다가 이러다 죽겠다 싶을 적에만 연락을 했었다. 그런 시간들을 지나며 만난 모든 사람들이 오늘 나를 살아가게 하고있다. 많은 순간 어떤 기쁨을, 위로를, 용기를 얻는다. 나는 그걸로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 그 이상을 원한다. 내 가슴을 후벼파고 나를 땅바닥에 엎드리게 할 만큼의 깊은 사랑을 원한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 땅바닥에 내팽개칠 때, 나를 내팽개치는 당신의 심정과 나를 내팽개치는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해 절망하기를 기대한다.

“방은 좀 치웠어요?”
매주 듣는 이 질문, 나는 회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다.
“어제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퀸 영화를 봤어요. 그 영화가 제게 현실을 살아갈 용기를 줬어요. 그래서 바로 집으로 갔어요. 방은 치우지 못했지만 수도관을 녹이려는 시도를 했어요. 결국 수도관은 녹이지 못했지만요. 원래는 바로 집에 안가요. 동네를 서너바퀴 이상 돌고, 그네라도 한시간씩 타고 집에 가요. 그럼 당연히 기력이 없고, 바로 잘 준비를 해야하니까 방을 치울 수 없었어요.”

지금 정신과 주치의의 좋은 점은 아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해준다는거다. 살찌는게 두려워서 밥을 먹기 싫다던지 속이 미식거려서 밥이 안넘어간다고 내가 말 할 때 두부나 죽으로 식사를 대신하라는 조언을 해줬었다. 이번에는 상자를 구해서 당장 쓸 물건과 한참 안 쓸 물건만 나눠서 담아보라했다. 나는 또 회피하기로 했다.
“그것만도 두세시간은 걸릴거에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저희집에 잡동사니가 많아요. 그리고 몇시간 뒤에 타투 예약해둔 것 있고, 미용실도 갈거고, 친구 만나서 밥먹고 그 친구랑 공연보고 밤새 놀다가 출근할거에요. 오늘은 시간이 없어요.”
앞서 우리집 수도관 동파된 얘기도 했었는데, 오늘 날이 풀려서 수도관이 터질 수도 있다고한다. 그럼 삼사십만원 정도 들건데, 타투는 다음에 받아도 되지 않냐고 주치의가 말했다. 나는 이미 예약해둔거라 안된다고 했다.

사실 정신과를 나와서 곧장 미용실에 들러 머리부터 새로 할 예정이었는데, ‘다음에 해도 되는거’라는 표현이 마음에 남아서 관뒀다. 바로 집에 가기로 했다. 집에 가는길에 단호박 튀김, 야채 튀김, 떡볶이 1인분을 포장했다. 어제 먹다 남은 피자도 집에 있었다. 집에 다 와서 계단을 오르기 전 1층 문을 두드렸다. 1층에 사는 할배가 나왔다. 수도관이 얼어서 사람 부르려는데 거긴 물 나오냐 물었더니 할배는 말귀를 못알아듣고 여긴 노인네 혼자 산다고 말하며 문을 닫았다. 아무튼 물이 나오니까 그냥 있는거겠지. 식사만 하고 수리업체에 연락을 하자고 생각하며 집에 들어왔다. 포장해온 분식들과 피자를 먹으며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유투브 영상들을 몇개 봤다. 전기요를 뎁히고 그 위에 누워서 담요를 덮고 웹툰을 봤다. 타투 하러 가는데까지 얼마나 걸리나 검색해보니 당장 출발해야했었다. 5분만이라도 자기로 했다. 우리집 수도관은 터져버릴거다. 삼사십만원은 신용카드 할부로 계산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오늘 12시가 넘으면 2019년이다. 2019년 다이어리를 들고 나가야겠다. 그 생각을 하니 눈이 떠졌다. 그런데 방이 너무 더러워서 일어나기 싫었다. 일어날 수 없었다. 겨우 기운을 내서 물건들을 뒤적이며 다이어리를 찾아보는데, 찾을 수 없었다. 나갈 채비를 해서 집을 나왔다.
우리 모두가 챔피언이라는 퀸의 노래를 생각한다. 패배자를 위한 시간 따위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챔피언이기 때문이라는 그 노래를 생각한다. 삶을 한 번 살아가보자. 수도관은 안터질지도 모른다. 용기를 내보자. 하기 싫은 마음, 인간관계에 대해 미리 집어삼킨 겁보다 내가 더 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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