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싶다. 뭘 어쩌자는건지. 심리상담 중에 내가 지금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이 이 흐릿한 상태라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는? 아마도, 원하는 게 확실했던 것 같다. 내 에니어그램 유형인 7w8에 대한 설명 중에도 확실한 상태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명확한 것. 뚜렷한 것. 세상은 흑백이 아닌 회색들로 이루어져있다지만, 적어도 나 자신과 내가 보는 것들은 흑백으로 분리해야 안정감이 느껴졌던 것 같다. 나 자신과 내가 보는 것들은 곧 내가 사는 세상의 전부인 걸 안다. 아무튼 그랬던 것 같다. "같다."라는 표현을 자꾸만 쓰는 것도 기분이 안 좋다. 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원래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요즈음의 나는, 관계를 끊는 게 맞다고 판단되는 사..
몇 번의 연애 끝에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걸 몰랐던 적이 있던가. 나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나는 왜 이런 사람인 걸까. 인터넷으로 회피형 애착에 대한 글들을 찾아 모조리 읽어보았다. 혼자가 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사람.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따듯한 소이라떼 한 잔을 가지고 자리에 앉았다. 너무 뜨거워서 조금 기다렸다가 마시려고 한다. 뜨거운 소이라떼가 식을 때를 너무 오래 기다린다면 싱거운 느낌의 차갑거나 미지근한 소이라떼를 마시게 될 것이다. 다만 인간관계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만 더 식히고 표현합시다' 하다가 완전히 식어버려 표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향한 열정이며 애정이 제아무리 소중한 것이..
덕질을 새로 시작했다. 연휴 시작을 앞두고서는 연휴동안 너무 쳐질까봐, 그래서 연휴가 끝나면 출근을 못 할 수도 있을까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웬걸 밤에 잠이 안 올 만큼 흥분상태로 연휴를 보냈다. 처음에는 '밤에 잠이 오는 것이 신기할만큼'의 흥분 상태였는데, '밤에 잠이 안 올 만큼'의 흥분 상태로 진화했다. 작년 여름 등록했던 자살예방센터에서 사례관리팀으로 넘어가 새로운 선생님에게 관리받기 시작한 지 벌써 몇달이다. 연휴가 지나면 출근을 못 할 수도 있겠다 걱정을 했던 것을 선생님이 잘 알고계시기에 안부를 묻고자 전화를 주셨다. 괜찮았다고, "덕질을 시작해서"라고 말하니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아서 "아이돌을 좋아하기 시작해서"라고 다시 말했다. 어떤 아이돌이냐 물어와서 "BTS요..." 라고 대답하는..
세상이 나를 빼놓고도 잘 돌아간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누군가는 가고, 내가 포기한 일을 누군가는 해내고있고,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누군가는 갖고있다는 것이 잘 믿기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만의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고있는데, 나는 여기에 멈춰서 누가 근황을 물을 때마다 "팽팽 놀아요."라고 대답한다. 일요일마다 커피를 두 잔 넘게 마시고 밤을 새 몽롱한 월요일을 맞이하는 것이 이제는 루틴이 됐다. 밤을 새는 것은 우울감을 반짝 개선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글을 봤던 것 같다. 어젯밤에는 오랜만에 밤산책도 다녀왔다. 아침 9시가 되자마자 주민센터 무인기기에 가서 검정고시 성적 증명서를 출력해 방통대 성남지점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니 LH 재계약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
얼마 전 나 혼자 신나서 떠들었던 순간들을 부끄러이 떠올려본다. 그 날 나는 외로웠고,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내가 요즈음 어떻게 사는지, 왜 그렇게 사는지 궁금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침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은 이야기를 잘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내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음에도,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네요라는 말이 얼마쯤 뻔하고 또 부끄럽게 느껴져 말았다. 겉치레 인사도 없이 자기 얘기만 늘어놓은 것이다. 물론 그 사람은 그 순간을 희생이라고 여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몇 번의 리액션과 질문에 계속 이야기를 쏟아내는 나를 그냥 그런 사람, 할 말이 많은 사람, 자기 이야기가 많은 사람 정도로 생각하며 그 순간을 지났을 수도 있다. 어쩌면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아무 데나 고개를 파묻고 울어버리고 싶다. 밝은 모습이건, 확신에 차 있던 모습이건 껍데기일 뿐인데 그 껍데기마저 관리가 안되고 있다. 우울할 때 글이 잘 써진다고 누가 그랬지, 은유 작가님은 쓰는 고통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강할 때만이 글을 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안 쓰는 고통 따위 모르는 사람이면서도, 어쩌면 안 쓰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지금 블로그에라도 끄적이고 있나. 무언가 내 안에서 끄집어내고 싶다. 거대한 우울을, 거대한 분노를, 억울함을. 더럽고 추악한 뭔가를 꺼내는, 피지를 짜내는 듯 더러우면서도 짜릿한 경험 한 번 이면 모든 게 해결될 것만 같다. 모든 문제가 그렇게 한 방으로 해결되길 기대한다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삶은 한 방과 다른 한 방 사이의 무엇이 아니라 하루하루 쌓이..
말귀를 못알아들음에 대한 내 분노는 내 주양육자였던 할머니로부터 시작됐다. 어느날 몸살을 앓던 나는, 몸살이 빨리 낫도록 찜질방에 다녀오고싶었다. 찜질방 다녀오게 용돈 좀 달라는 내게 할머니는 말했다. "찜질방 간다고 몸살이 낫지는 않는데, 다녀오고싶으면 다녀와." 이미 말귀를 못알아들음에 대한 분노가 누적되어있던 나는, 머릿속 인내의 끈이 곧바로 끊겨 화를 냈다. 찜질방에 간다고 몸살이 낫는게 아니라면 내가 대체 왜 찜질방에 가냐고. 애초에 뚜렷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에 소용이 없다면 내가 대체 왜 그걸 실행에 옮기냐고. 할머니는 똑같은 말만 조금 다른 말투로 반복할 뿐이었다. "거기 간다고 몸살이 낫는 거는 아니야, 그래도 가고싶으면 가라고." 내 분노는 벽을 향하는 것과 같았다. 할머니는 한결같..
아무래도 조증인 것 같아, 어떤 이유들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정신과 주치의에게 말했다. 그날로 약이 모두 바뀌었다. 정신이 너무 들뜬 탓에 무엇에도 집중은 못하고 빨빨거리고 돌아다닐 뿐이었는데 약을 바꾼 후로는 그나마 생산적인 일들이 가능해졌다. 저녁 약을 먹고 조금 어질 한 기분으로 집 청소를 그리 열심히 했다. 한 주 후 다시 찾은 병원에서 조증 상태가 조금 가라앉아 일상이 풍부해졌다며 기뻐했다. 의사는 다행이라며 약을 2주 치 처방해줬다. 나는 기본적으로 한 번 방문할 때마다 한 주 치의 약을 처방받는다. 처음으로 꽤나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던 지난달에도 딱 한 번 열흘 치의 약을 처방받았었다. 그리고 이렇게 정신과 주치의의 일정이나 내 주머니 사정 등 예외의 경우에만 2주 치를 처방받는다. 아무튼 ..